목차
- 화학발명의 실시가능 요건 — 왜 다른 분야보다 엄격한가
- 특허법 제42조 제3항 제1호와 ‘실험의 과학’
- 명세서 기재사항 삭제 전략의 일반적 위험
- 대법원의 판단
- 이 글이 다루지 않는 범위
대법원 2026. 1. 15. 선고 2024후10658 판결은 화학발명의 실시가능 요건에 관하여, 명세서에 기재된 유일한 실시례인 2.5수화물 초분자 복합체를 청구범위에서 제외하고 나머지 광범위한 고체 형태를 청구한 경우 특허법 제42조 제3항 제1호의 명세서 기재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 판결은 화학발명에서 청구범위를 넓히려는 전략이 오히려 전체 청구항의 무효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제약 특허 명세서 작성 실무에 중요한 시사점을 남깁니다.
화학발명의 실시가능 요건 — 왜 다른 분야보다 엄격한가
특허법 제42조 제3항 제1호와 ‘실험의 과학’
특허법 제42조 제3항 제1호는 발명의 설명을 통상의 기술자가 그 발명을 쉽게 실시할 수 있도록 명확하고 상세하게 적을 것을 요구합니다. 이른바 실시가능 요건(enablement requirement)입니다. 이 요건의 충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에 관하여, 대법원은 “통상의 기술자가 출원 시의 기술 수준으로 보아 과도한 실험이나 특수한 지식을 부가하지 않고서도 명세서의 기재에 의하여 당해 발명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동시에 재현할 수 있는 정도”라는 법리를 확립하여 왔습니다(대법원 2006. 11. 24. 선고 2003후2072 판결, 대법원 2024. 10. 8. 선고 2021후10886 판결 등).
기계장치 등에 관한 발명에서는 명세서에 실시례가 기재되지 않더라도 통상의 기술자가 발명의 구성으로부터 그 작용과 효과를 이해하고 재현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화학발명은 사정이 다릅니다. 대법원은 일찍이 “이른바 실험의 과학이라고 하는 화학발명의 경우에는 예측가능성 또는 실현가능성이 현저히 부족하여 실험데이터가 제시된 실험례가 기재되지 않으면 통상의 기술자가 그 발명의 효과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용이하게 재현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한 바 있습니다(대법원 2001. 11. 30. 선고 2001후65 판결).
이처럼 화학발명에서는 구조식이나 화학식만으로는 실제로 해당 화합물이 합성 가능한지, 합성된다면 어떤 물성을 갖는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실험을 통해 실제로 확인하지 않는 한 결과를 알 수 없는 ‘실험의 과학’이라는 본질적 특성 때문에, 명세서에 구체적인 실험데이터를 포함한 실시례가 기재되어야 실시가능 요건이 충족됩니다.
사건의 기술적 배경
이 사건의 특허발명은 심부전 치료제 엔트레스토(Entresto)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알려진 제약 특허입니다. 두 가지 활성성분인 발사르탄과 사쿠비트릴이 나트륨 양이온 및 물 분자와 비공유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화학물질처럼 회합된 초분자 복합체에 관한 것으로,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명세서에서 유일하게 실체가 확인된 형태가 발사르탄:사쿠비트릴:나트륨 양이온:물 분자가 1:1:3:2.5의 비율로 결합된 2.5수화물 초분자 복합체라는 것입니다. 이 2.5수화물은 구성요소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결정 구조 자체가 변하거나 복합체가 형성되지 않을 수 있는 화학양론적 수화물에 해당합니다.
명세서 기재사항의 삭제가 초래하는 구조적 문제
유일한 실시례를 ‘빼고’ 나머지를 청구하다
이 사건의 본질적 문제는 기술 자체의 난해함이 아니라, 명세서에 기재된 유일한 실시례를 청구범위에서 제외하는 전략이 실시가능 요건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 구분 | 내용 |
|---|---|
| 명세서에 기재된 실시례 | 2.5수화물 초분자 복합체 (1:1:3:2.5 비율의 결정질 형태) |
| 제1항의 청구범위 | 다양한 고체 형태(결정질, 부분 결정질, 무정형, 다형 형태)의 초분자 복합체 — 단, 결정질 형태의 2.5수화물 초분자 복합체만 제외 |
| 결과 | 명세서에서 유일하게 실체가 확인된 형태가 청구범위에서 제외되고, 실시례가 없는 나머지 형태만 청구됨 |
왜 이런 전략을 취했는가 — 복수 특허 간 역할 분담
이러한 청구범위 구조가 만들어진 배경을 추론하면, 전형적인 제약 특허 포트폴리오 전략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즉, 2.5수화물 초분자 복합체(실제 상용화된 결정형)는 별도의 결정형 특허로 보호하고, 이 사건 특허에서는 2.5수화물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형태의 초분자 복합체를 넓게 청구하여, 경쟁사가 2.5수화물과 다른 형태의 복합체를 개발하더라도 여전히 특허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포괄적인 보호망을 구축하려는 것입니다.
이 전략은 제약업계에서 드문 것이 아닙니다. 오리지널 제약사는 하나의 활성성분에 대하여 물질 특허, 결정형 특허, 제형 특허, 용도 특허 등 복수의 특허를 단계적으로 출원하며, 각 특허의 청구범위를 서로 보완적으로 설계하여 특허 보호 기간을 극대화합니다. 이때 특허 간 청구범위가 중복되지 않도록, 하나의 특허에서 다른 특허가 보호하는 범위를 제외(disclaimer)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시가능 요건의 관점에서 본 구조적 결함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실시가능 요건의 관점에서 치명적인 결함을 내포합니다. 실시가능 요건은 청구범위에 포함된 발명을 통상의 기술자가 명세서의 기재에 의하여 재현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구범위에서 유일한 실시례를 제외하면, 청구범위에 남아 있는 발명을 뒷받침하는 실시례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이 사건에서 그 구조적 결함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실시례와 청구범위의 완전한 단절: 명세서에 기재된 실험례 중 초분자 복합체에 해당하는 것은 2.5수화물뿐이고, 나머지 실험례(프로드러그)는 초분자 복합체가 아닙니다. 2.5수화물을 청구범위에서 제외하면, 청구범위 내에는 실시례로 뒷받침되는 발명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2) 기재 원리의 부재가 문제를 가중: 만약 명세서에 초분자 복합체가 형성되는 일반적 원리나 메커니즘이 기재되어 있었다면, 2.5수화물 이외의 형태도 그 원리로부터 유추 가능하다는 주장이 가능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명세서에는 복합체 형성 원리 자체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2.5수화물을 제외한 나머지 형태에 대한 실시가능성을 뒷받침할 근거가 전무하게 되었습니다.
(3) 넓은 청구범위가 오히려 역효과: 청구범위가 결정질, 부분 결정질, 무정형, 다형 형태 등 다양한 고체 형태를 포함하고 있어, 실시가능 요건의 충족을 위해서는 각 형태에 대한 실시례 또는 최소한 그 형태로의 도달 가능성을 설명하는 기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실시례를 제외하고 나면, 이 넓은 범위 전체가 실시례 없는 공백(空白)으로 남게 됩니다.
명세서 기재사항 삭제 전략의 일반적 위험
이 사건은 특정 기술 분야에 한정된 문제가 아닙니다. 명세서에 기재된 실시례 중 일부를 청구범위에서 제외하는 전략은 제약·화학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지만, 그로 인해 청구범위와 실시례 사이의 정합성이 붕괴될 위험을 항상 수반합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경우에 위험이 높습니다.
(1) 명세서에 실시례가 소수인 경우: 실시례가 1~2개뿐인데 그중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 청구범위를 뒷받침할 실시례가 부족해질 수 있습니다.
(2) 해당 기술 분야의 예측가능성이 낮은 경우: 화학·바이오 분야처럼 구조의 변화가 물성에 미치는 영향을 예측하기 어려운 분야에서는, 실시례 없이는 통상의 기술자가 청구범위 내의 다른 실시형태를 재현할 수 없다고 판단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3) 복합체 형성 원리 등 기술적 메커니즘의 설명이 없는 경우: 개별 실시례를 넘어 일반적 원리가 기재되어 있다면 다른 실시형태에 대한 유추가 가능하지만, 원리 자체가 없으면 실시례 의존도가 극도로 높아집니다.
대법원의 판단
원심의 판단 유지
특허법원(2024. 5. 30. 선고 2023허12695 판결)은 이 사건 특허발명의 명세서에 제1항 발명에 관한 직접적인 기재가 없을 뿐 아니라, 통상의 기술자가 제1항 발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재현할 수 있는 정도로 기재되어 있지 아니하여 특허법 제42조 제3항 제1호의 명세서 기재요건을 위반하였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원고는 이 사건 특허발명의 본질이나 기술적 특징, 특허법 제42조 제3항 제1호에서 정한 명세서 기재요건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였다는 취지로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심 판단을 그대로 유지하며 상고를 기각하였습니다. 대법원의 판단 근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법원의 4가지 판단 근거
(1) 화학발명으로서의 광범위성
이 사건 제1항 발명은 발사르탄과 사쿠비트릴이 나트륨 양이온 및 물 분자와 비공유 상호작용으로 회합된 다양한 고체 형태(결정질, 부분 결정질, 무정형, 다형 형태)의 초분자 복합체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화학발명입니다. 2.5수화물만 제외되었으므로, 물 분자의 수나 결정 형태가 상이한 무수한 변형이 청구범위에 포함됩니다.
(2) 청구범위에 속하는 실시례의 부재
명세서에 기재된 실험례는 2.5수화물 초분자 복합체와 프로드러그뿐입니다. 2.5수화물은 청구범위에서 제외되어 있고, 프로드러그는 초분자 복합체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정작 이 사건 제1항 발명에 속하는 초분자 복합체의 실시례에 관하여는 명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3) 복합체 형성 원리의 미기재
명세서에는 발사르탄과 사쿠비트릴이 초분자 복합체를 형성하는 원리가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실체가 확인된 2.5수화물 초분자 복합체에 대해서조차 그 구성요소 간 비공유 상호작용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기술적 내용이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4) 우선일 당시 기술수준에 비추어 제조 불가능
통상의 기술자는 우선일 당시뿐 아니라 원심 변론종결 시에도, 2.5수화물과 물 분자 개수를 달리하거나 물 분자를 포함하지 않는 경우에 여전히 비공유 상호작용이 균형을 이루어 초분자 복합체가 형성될 수 있다고 인식하고 이를 제조할 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대법원은 이 네 가지 근거를 종합하여, “통상의 기술자가 이 사건 특허발명의 우선일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보아 과도한 실험이나 특수한 지식을 부가하지 않고서는 발명에 관한 설명에 기재된 사항에 의하여 이 사건 제1항 발명의 화합물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재현할 수 있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종속항에 대한 판단
대법원은 제1항 발명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인용하는 종속항인 제3항부터 제11항 발명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실시가능 요건 불충족을 인정하였습니다(제2항 발명은 이 사건 심판 청구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독립항이 실시가능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이를 인용하면서 기술적 특징을 한정하거나 구성요소를 추가하는 형식의 종속항 역시 그 기재요건을 충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엔트레스토 특허 분쟁의 전체 맥락
이 판결은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노바티스(Novartis)의 심부전 치료제 엔트레스토를 둘러싼 대규모 특허 분쟁의 일부입니다. 국내 제네릭 제약사들은 엔트레스토 관련 복수의 특허에 대하여 무효심판을 청구하였고, 결정형 특허, 염/수화물 특허, 용도 특허 등 주요 특허에 대하여 대법원에서 잇따라 제네릭사 측의 승소 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이 사건(2024후10658)은 그중에서도 초분자 복합체의 다양한 고체 형태를 포괄하는 특허에 대한 것으로, 명세서 기재불비를 쟁점으로 한 무효 공격이 성공한 사례입니다. 일련의 엔트레스토 특허 분쟁에서 제네릭사들이 각 특허의 청구범위와 명세서 기재 내용의 괴리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개별 특허별로 쟁점을 달리한 무효 공격을 전개한 점이 주목됩니다.
한편, 미국에서도 엔트레스토 관련 특허의 유효성이 쟁점이 되었습니다. 미국 연방순회항소법원(CAFC)은 2025년 1월 10일 In re Entresto 사건(No. 23-2218)에서 발사르탄과 사쿠비트릴의 병용투여를 청구하는 미국 특허 제8,101,659호에 대하여, 기재요건(written description) 위반을 이유로 한 무효 판단을 파기하고 해당 청구항의 유효성을 인정하였습니다. 다만 이 미국 특허는 ‘병용투여(administered in combination)’를 청구한 것으로서 이 사건 한국 특허처럼 초분자 복합체의 고체 형태를 청구한 것과는 청구범위의 구체적 내용이 상이합니다. 이는 동일한 기술 플랫폼이라 하더라도 각국의 기재요건 법리와 청구범위 작성 전략에 따라 특허의 유·무효 판단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실무적 시사점
(1) 청구범위와 실시례의 정합성 확보
이 판결이 제약·화학 분야 특허 실무에 주는 가장 직접적인 교훈은, 청구범위에 포함되는 모든 유형에 대하여 실시례를 기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화학발명에서는 구조나 조성의 변화가 물성이나 효능에 미치는 영향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청구범위가 넓을수록 이를 뒷받침하는 실시례의 폭도 넓어야 합니다.
이 사건에서는 명세서에 기재된 유일한 실시례를 청구범위에서 제외함으로써 실시례와 청구범위의 정합성이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출원 당시에는 넓은 권리범위를 확보하려는 합리적 전략으로 보일 수 있으나, 무효심판에서는 치명적인 취약점이 됩니다.
(2) 초분자 복합체 등 예측가능성이 낮은 분야의 기재 수준
초분자 복합체와 같이 비공유 상호작용에 기반한 화학 구조는 그 형성 여부를 사전에 예측하기가 특히 어렵습니다. 대법원은 이 점을 명확히 지적하며, 우선일 당시뿐 아니라 원심 변론종결 시에도 예측이 어려웠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는 예측가능성이 낮은 기술 분야에서는 더욱 구체적이고 폭넓은 실험데이터의 기재가 요구된다는 점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3) 제네릭/바이오시밀러 업체의 무효 전략
이 판결은 제네릭 업체 입장에서 실시가능 요건 공격이 유효한 무효 전략이 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특히 오리지널 제약사가 복수의 관련 특허를 출원하면서 각 특허의 청구범위를 서로 다르게 설정한 경우, 개별 특허의 명세서 기재 내용과 해당 청구범위 사이의 괴리를 분석하는 것이 효과적인 무효 공격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4) 글로벌 출원 전략에서의 유의점
동일한 기술에 기반한 특허라 하더라도 한국, 미국, 유럽 등 각국의 기재요건 법리는 상이합니다. 엔트레스토 관련 특허의 경우, 한국에서는 초분자 복합체의 고체 형태를 포괄하는 청구항이 실시가능 요건 불충족으로 무효가 된 반면, 미국에서는 병용투여를 청구하는 별도의 특허(U.S. Patent 8,101,659)에 대하여 CAFC가 기재요건 위반 주장을 배척하고 유효성을 인정하였습니다(In re Entresto, No. 23-2218, 2025. 1. 10.). 이처럼 청구범위의 구체적 내용과 각국 법리의 차이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글로벌 출원 시 각국의 기재요건 기준에 맞추어 명세서와 청구범위를 조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글이 다루지 않는 범위
이 글은 대법원 2024후10658 판결의 실시가능 요건(특허법 제42조 제3항 제1호) 쟁점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엔트레스토 관련 다른 특허(결정형 특허, 염/수화물 특허, 용도 특허 등)의 무효 사유나 이 사건 특허의 다른 무효 사유(진보성, 뒷받침 요건 등)는 분석 범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 판결은 이 사건 특허의 특정 청구항에 대한 것이므로, 화학발명의 실시가능 요건에 대한 일반 법리를 변경하거나 새롭게 정립한 것은 아닙니다.
작성자: 서교준 변리사/변호사 | 프로필 보기 전문분야: 상표·디자인 분쟁, 특허 심판·소송 최종 업데이트: 2026-03-17
